회사 피드백 전화 연락을 받을 때까지 나는 책을 붙들고 있어도 한글자도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촉각과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세워져 있었다. 이때가 5월 중순, 기말고사 시험시작은 5월 24일 부터. 허나 여전히 나의 모든 포커스는 오직 단 하나의 것에만 초점이 맞춰졌던 때였다. 재수강 시스템 개념이 없는 영국대학에서 그것은 대학 생활 최대의 리스크였다.
시험봐야할 5개의 전공 과목 모두가 1년 동안 배운 과목으로 2학기 내용만 시험범위에 해당하는 중급재무회계를 제외하고 기말고사 문제 제출 범위는 당연히 1년 전과정이었다.
말이 1년이지 정말 양이 어마어마하다. 제일 싫어하는 과목의 강의노트를 쓱 훑어보고 교수님의 Revision note를 보고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됐다. 내가 왜 그동안 인터뷰 준비에만 올인하고 시험공부에 소홀히 했는지 그제서야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 과목이라도 패스하지 못하면 유급 당하는 엄격한 영국대학 시스템이 원망스러웠다. 왜 영국대학은 재수강 개념이 없는지, 왜 이리 융통성이 없는지. 하지만 이제와서 한탄하면 어쩌랴. 한탄하고 있을 시간이 아까웠다. 눈에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나의 시험기간은 24일부터 그 다음달 4일까지. 모든 과목의 작년, 재작년 기말고사 기출 문제를 검토, 분석한 후 나는 다음과 판단을 내렸다. ‘이 시점에서 나 혼자 힘으론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나는 난생 처음으로 학교 과제, 프로젝트 외에 그룹스터디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영국친구들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2분이내로 n명에게서 답장.
걔네들도 지금 급하긴 급한가보다 생각했다.
그 리하여 나는 전과목 시험대비를 그룹스터디라는 카드로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이때, 그룹스터디는 무조건 2명. 나와 단 한명의 친구. 그리고 같은 과목에 대한 그룹스터디를 다른 날짜, 다른 시각으로 또 다른 친구와 그룹스터디를 구성해 애벌로 갔다. 한마디로 이중 그룹 스터디. 공동 멤버는 바로 나.
한국에서 각종 과목 개인과외를 오랫동안 받아서 학원보다는 독과외를 선호하는 내게 솔직히 그룹 스터디는 조금 많이 꺼려졌다. 하지만 위기가 코앞에 닥치니 생각나는건 오로지, 그룹스터디. 그당시 나는친구들을 과외선생님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룹스터디의 진도 스피드는 혼자 공부했을 때보다 그 마력(?)이 장난 아니었다. 나 혼자 4시간 넘게 끙끙댔을 것을 단 20분만에 둘이서 머리 싸매며 해결했다. 나는 기출문제 족보와 수업시간때 교수님, 조교가 한 설명을 필기한 목숨과도 같은 노트장과 설명을 했을 당시의 교수님 표정, 어투를 힘겹게 기억해내 예상 시험문제 예측(리스크가 큰 위험한 일이지만 이에 대한 얘기는 후에 할 예정), 다양한 정보수집으로 무장을 했고 나와 함께한 친구들은 정말 비상한 머리를 가진 똘똘한 애들이었다. 한마디로, 본인 머리 하나만 믿고 사는 아이들. 공부 별로 안해도 점수 잘 나오는 애들은 외국도 마찬가지다. 그 아이들이 전혀 얄밉지가 않은건 본인 자신이 본인 머리만 믿고 산다는 걸 모르기에. (참고로, 외국 애들 똘똘한건 정말 따라잡지 못한다, 오로지 성실함으로 유학생들은 밀어붙여야 함)
그렇게 매일 친구와 대여섯시간씩 도서관에서 그룹스터디를 하고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복습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또 다른 친구와 혼 자 복습중, 그룹스터디때 훑고 넘어간 내용 중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친구에게 물어보고 그친구와 또 진도를 뺐다. 이렇게 양쪽에서 진도를 뺐기에 한 친구와 할 때에는 그 그룹스터디는 복습하는 날이 되고 또 다른 친구와 그룹스터디를 할 땐 시험공부 진도를 뺐고 그리고 vice versa.
그러다가 시험 일주일전, 감기에 심하게 걸렸다. 얼른 약국에 가서 종합 약을 사왔지만 체질이 달라서 영국 약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약은 한국 약으로 먹어야 한다) 이번 년도에는 겨울방학이나 봄방학때 한국에 가지 않았기에 작년 가을, 한국에서 가져온 약도 다 떨어져 한국에서 공수해올 때까지 생으로 앓았다. 상태는 더 악화됐고 몸이 많이 안 좋아졌다. 부랴부랴 어머니가 보내주신 약 액티피드를 하루 6알씩 먹고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아팠던 와중에도 그룹스터디는 계획 차질 없이 계속 이어갔고 아침 7시에도 만나고 오후 2시에도 만나고 저녁 10시에도 만나 공부했다. 다만, 감기가 좀 심했을 당시엔, 친구가 나와 조금 멀리 떨어져 앉았었다ㅋ
그룹스터디를 하면서 공부가 맛있다는 기분을 처음 느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시험공부가 이렇게 재밌는 줄은 몰랐다. 하나 하나 지식을 깨달아가는 맛이 있었다. 그룹스터디가 끝나고 이제 개별 공부활동으로 돌아가 최종으로 훑어보는 작업을 할 때에도 날밤을 샜다. 특히나 시험이 오후가 아닌 아침 9시에 잡혀 있는 날에는 혹시 늦잠이라도 자서 시험장에 늦을까봐 전날 절대 잠을 자지 않는 버릇 때문에 시험기간이 시작되고 , 2주동안 잠은 20시간도 채 자지 않았다. 자는 시간이 아까워서 침대에 누워 잘 수가 없었다. 몸이 눕혀지는 걸 내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말 졸릴 땐 그냥 두손을 팔짱 끼고 의자에 앚아서 잤다.
밤을 일정 기간 이상 계속 새면 눈이 따가운 것 그 이상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강의노트를 읽고 있는데 눈에 초점이 모이질 않았다. 눈을 아무리 깜박여도 시야는 점점 뿌얘지고 초점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그보다 더 희한한
것은 배가 고프지 않았던 것. 밥 지어 먹는 시간도 아깝고 머리 감는 시간도 아깝고 밥은 하루 한끼로 대충 떼웠다.
그때에는 입에 뭐가 들어가는 것보다 머리에 무엇을 담느냐가 더 중요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했는지 믿을 수가 없다. 도대체 내게 어디서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왔는지 신기하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내가 반드시 나올 것이라 예상한 내용, 범위, 문제가 전과목 시험에 모두 나왔다. 시험 문제는 객관식이 아니라 소논문, 저널 형식의 에세이 시험이기 때문에 그리고 초중고등학교 때처럼 교수가 이문제는 시험에 나온다 하고 상냥하게 언급해주는 것도 아닌데 그 어마어마한 양의 전공 내용들을 중에서 시험 문제 내용을 정확히 맞추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지만 리스크가 컸지만 시험지를 봤을 때의 짜릿함, 답안지에 나의 생각을 담으면서 룰루랄라 속으로 흥얼흥얼 거렸다.
내가 이렇게 까지 목숨걸듯 시험공부를 했던 것은 단순히 과목을 fail하기 싫어서(물론 당연하다), 그리고 한과목이라도 fail하면 한 학년을 다시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끔찍한가. 학비는 또 나가고 배웠던 거 또 배우고. 그리고 한 학년을 다시 다닌다면 내 계획이 한순감에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말고사 시험공부를 하면서, 아니 그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때는 5월 중순, 나는 전편 글에서도 언급하지 않은, 네 번째 시나리오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 회사에서 추가 면접을 또 보자고 연락이 와서 그 당시 나의 스케줄과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면접 준비, 시험공부, 그리고 다른 계획 준비 및 실행하기…
결국 6월 4일, 첫째주 금요일. 시험이 무사히 마치고 시험장에서 빠져나왔을 때 바라본 하늘은 청량했다. 그 첫째주 주말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 또는 ‘겨울잠 자는 백곰’ 처럼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리고 쥐죽은 듯이 무려 16시간 동안 잠을 잤다.
정신력의 감퇴는 육체의 쇠퇴를 초래한다나. 마음에 긴장이 풀리고 평화로운 다음날 월요일,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는데 몸이 이상함을 느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리다 말고 나는 침대에 픽 쓰러졌다. 여전히
머리에 현기증을 느꼈다. 속도 메스꺼웠다. 10분 정도 멍하니 침 대에 누워있었나. 조금 괜찮아지자 허기를 채우러 한식 레스토랑에
갔다. 주문을 하고 레스토랑 사장님과 안부 몇마디 주고 받다가 또다시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화장실로 가서 애꿎은 침만 계속 밷었다.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얼굴은 멀쩡해 보였다.
레스토랑 카운터로 돌아와 음식이 나올 때까지 반쯤 걸터 앉은 채로 서서 기다리다가 조금 힘겹게 사장님께 저 물좀 주시면 안될까요 라고 여쭸다.
그리고 사장님이 물을 가져오시기도 전에 실신해버렸다ㅋ 말 그대로 시야가 천장을 향하는 실신.
무슨 일이냐는 정신 차리라는, 숨을 쉬라는, 주방장에 일하시는 분과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식을 점점 잃어가는데 주방장 분이 계속 팔을 주물러주시고 정신차리라고 내 뺨을 계속 때려주셨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당시 눈에 초점이 풀린 것은 물론이요, 얼굴과 입술이 새하얬다고 한다. 구급대원들이 오고 나는 들 것에 실려 앰뷸런스에 실려갔다. 구급대원이 좀더 숨쉬기 편할 것이라며 숨을 잘 쉬지 못하는 내게 산소마스크를 씌워줬다.
응급실에 도착해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이상한 스티커를 수십개 붙이고 링겔을 꽂고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간호사와 담당 의사가 수시로 와 내 혈압 수치를 체크했다.
처음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름과 주소도 제대로 말 못할 정도로 의식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점점 의식을 되찾기 시작할 때쯤, 인턴으로 보이는 의사가 내게 왔다.
피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 남자 간호사 한분이 내게 햄&치즈 샌드위치(병원 음식은 아무거나 다 맛있다)와 티를 주셨고 다 먹고 나니 담당 의사분이 내게 오셨다. 피검사 결과, 지극히 정상이며 아마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무리해서 그런 것 같다-라고 말씀해주셨다.
체력하면 외국애들보다 더 뛰어나진 않지만 외국 아이들과 견줄 수 있는, 막강 체력을 자랑하는 나인데 그런 내가
쓰러지다니. 이번의 일은 일종의 내 몸의 경고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론 정말 기뻤다. 나의 정신력이 몸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나의 정신력은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저혈압이라는 것은 조금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체질이 원래 만성 저혈압이니 어쩔수는 없지만 유학생활하면서 먹는 것과 건강관리에 더욱더 각별히 신경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앰뷸런스 안의 차가움이란, 병원으로 실려가본 사람만이 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태워져서 심할 경우엔 생사를 오고 간다. 뿌옇게 김이 서리는 산소 호흡기를 힘없이 바라 보면서 정말, 내가 유학생활하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나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젊은 나이에. 그때 그 순간은 아프고 의식이 없고를 떠나서 허무했다.
사람이 아무리 펄펄 건강하게 살고 이것저것 자기가 하고픈 일을 하고 지내도 아프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을, 건강을 잃으면 그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건강을 잃었는데 해외유학이 무슨 소용이고 공부가 무슨 힘을 쓴단 말인가.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이 해외유학생이 아니더라도, 모든 분들이 항상 건강했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항상 건강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