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된 진짜 이유
재작년 내 상태가 어땠더라 기억을 더듬으려니 좀 막막했는데 운 좋게도 그때 끄적였던 일기 쪼가리를 발견했다.
Evernote는 참 좋다. 굉장히 애용하고 있다.
에피소드 2013/01/14
올초, 당시 나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애썼고, 또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속 시원히 말할 수 없지만, 현재까지 파편적으로 드러난 것은 매일의 일상이 똑같고 하루가 공허하며 무언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아무리 열심히 하루를 보내도 성취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도무지 불안과 결핍이 생기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왜 그런 걸까?
사이트 개편 작업, 보안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와 초조함으로 집에서 감옥살이 아닌 감옥살이를 했었다. 아는 동생이 대놓고 사업모델을 베껴서 창업대회에 나간 짜증나는 경험이 별것도 아닌데 사람을 오바스럽게 만든다.
중1때인가 도덕 과목 시간에 사람은 사회적 인간이라고 배웠는데, 그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매우 지쳐 있었다. 그래서 주말 중 하루는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작정 서울 여기저기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오곤 했었다. 무엇을 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오로지 이곳 저곳 걸어다닌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걸음을 멈춰설 때면 좌우로 시선을 둘러보았고 내 옆의 사람들이 발걸음을 떼기 전까지 하늘을 올려다봤었다.
아마 나는 그때 방황했었던 걸까.
분명 내게 뭔가 엄청난 결핍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구멍이 왜 생긴 것 인지, 크기는 얼마큼인지, 무엇으로 메꿔야 하는지, 채우고 싶은 의지가 있긴 한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한 상태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고 한동안 무기력하게, 그냥 멍하니 무언가를 쳐다보며 지냈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나니 티비도, 인터넷도, 쇼핑이나, 교제도 더 이상은 나의 무료함을 달래줄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점점 더 상태가 안좋아지기 시작한 것을 느낀 건 전화기 너머 나의 목소리로 알아채린 부모님이었다.
(다시 현재 시점이다)
부모님 모두가 온유한 성격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교육에 있어서, 좋은 방향으로 자식을 이끌어갈 때 강압적이거나 다그치지 않으셨다. 정말 감사한 부분이다.
내 안에 사랑이 없음 (이것은 몇년째 단골 잔소리 소재이다)에 대해 이런저런 잔소리를 듣고 있다가 엄마 입에서 툭 튀어나온 성경 구절은, 전화상의 대화 몰입도를 높여주었다. '웬 뜬금 없이 성경구절이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성경구절을 인용할 정도면, 내 상태가 그렇게 심각할 정도인가'라는 위기감이 생겼다.
고린도전서 말씀이었는데, 결론은 ‘교회에 나가라’였다. ‘이건 내가 해결해줄 수 없는 부분이라고’.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떠나 무엇이든지 언제든지 조언과 꾸중을 마다 않는 최고의 스승이자 후원자인 엄마가 그런 말을 해주니 두려움이 더더욱 엄습해왔다.
내가 그렇게 망가졌나.
그 이후로 엄마는 교회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아빠가 바통터치했는데 이따끔씩 교회를 같이 가자고 할 때마다 단칼에 거절했다. 이유는 다시 어렸을 때 다녔던 여의도 교회로 가기가 좀 뭐했다. 유학간다고 연락을 전부 다 끊어버렸는데 행여 어렸을 적 친구들을 만날까라는 생각 자체도 껄끄러움이었고 아마 그게 주 이유였던 것 같다. 정말 매몰차게 떠났는데 다시 기어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쓸데없는 허세였지만 그땐 그렇게 느꼈다.
그러다가, 못이기는 척, 오전 11시 예배를 드렸는데 복도에서 예전 초중등부때 전도사님이셨던 박경준 목사님 눈에 띄어서 그길로 청년부 등록카드를 작성하고 말았다. 펜대를 만지작거리면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서도 등록함에 카드를 넣었을 땐, 포커페이스로 완전무장하고 다음주 예배드리러 오면 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개운했다.
지금에 와서야 미세하게 느끼는 거긴 하지만, 하나님이 내 마음을 터치하실 때는 ‘어? 어? 어!’ 하는 순간이나 미처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을 때 결정이나 행동을 하게끔 만드신다.
내가 갖고 있는 여러 면면 중 충동적인 모습을 최대치로 이끌어내실 때, 무언가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요즘은 괜시리 기대하는 마음도 조금 있다, 그럴때가 언제냐면,
이성적인 판단이 안될 때, 결정은 못하겠는데 왠지 이걸 해야만 할 때, 여기 있어야만 할 것 같을 때, 어디로 가야될 것 같을 때, 누굴 만나야 할 것 같을 때, 그 이후에 굉장한 일이 내게 벌어진다.
깨달음을 얻는 훈련이 되거나 하나님의 응원과 격려를 듬뿍 받는 날이 될 때도 있고, 새로운 귀인을 만나거나, 열정을 되찾게 하는 시간이 될 때도 있고, 그러한 감정들, 순간들이 모여 하루, 일주일, 한달을, 나의 인생을 꼼꼼히 빚어주신다.
왜 교회에 다시 나갔냐고? 하나님이 부르셨으니까. 표면상으론 부모님에 못 이겨 내 발로 교회를 나간거지만, 과연 이게 내 의지로 발걸음을 뗀 것일까. 내 의지가 아니었음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2013년 4월, 교회를 다시 다닌 후 새로운 사람들을 대거 만나 관계를 형성하고 그 사이사이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그때 당시엔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던 일들도 결국엔 하나님의 메시지였음을 이제서야 시인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힌트를 알아차리고, 왜 그것에 민감해야하는지, 하나님은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지를 하나님은 매우 알려주시고 싶어하셨던 것 같다. 내가 너와 이렇게 언제나 항상 매순간을 함께 하고 있음을, 하나님은 줄곧 하나님의 방식대로 나의 눈높이에 맞추어 가르치신 것이었다. 하나님 입장에선 얼마나 답답했을까.
말이 모태신앙이지, 이건 신앙의 기본지식도 없고 기본기도 없고 예배 순서 형식도 모르는 생초짜 날라리 모태신앙이었다. 이것을 하나부터 가르치려니 크고 작은 이벤트를 통해 깨우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어떠한 사건이 터져도 깨우치고 회개 할 생각을 안하니, 아니 할줄도 모르니 더 가관이었다.
2년 동안 무엇이 달라졌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겉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2년 동안은 사업하는 것도 미적지근, 편하게 슬렁슬렁 일했으니까. 그래서 나잇살만 먹었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치만 한가지 분명하게 확실하게 달라진 것은 내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았고 복음을 깨달았고 그 것을 매순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나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다던가, 성취감을 느낀다던가, 훌륭한 경력을 쌓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이자 기독교인으로서의 제1 사명감임을 확신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매튜 맥커너히가 책장 사이를 두고 벽 뒤에서 아무리 탕탕 손으로 치고 고함을 질러도 딸에게는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만, 미세한 진동을 느꼈는데 딸은 이것을 아빠의 메시지로 알아차린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 개념과 다르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존재하고 지금도 미래에도 존재하는 분, 어쩌면 하나님 자체가 시간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알맞겠다.
인간은, 나는 연약하다. 사람이기에 불완전하다. 좋은 일이 있으면 하하호호 신나하고 즐기고 웃고 떠들고, 그러다가도 안 좋은 일, 힘든 일 닥치면 짜증나고 지치고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진다. 그밖에 다양한 셀 수 없는 감정들과 생각들을 우리 안에 담고 살지만, 이러면 up, 저러면 down 하는, 영원하지 않는 무언가에 휘둘리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
무한하며 절대적인 가치를 쫓고 싶다. 그것에 내 인생을 걸고 싶다. 내 꺼, 내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결국은 하나님 허락하에 우리가 잠시 빌린 시간과 소유물이다. 이왕 빌린거, 제대로 잘 쓰고 싶다. 내 꺼라고 이리저리 막 쓰지 않고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내 모든 기준이 되어 설레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복음을 깨닫는 데 25년이 걸렸다. 그 이후 삶은 너무나 달라졌다. 달라졌다고 해서 눈꺼풀이 뒤집힐 정도로 눈에 보이는, 손으로 만져지는 변화가 아니라,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영역이 시야에 잡히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또 다른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소명.
하나님과의 만남은 내겐 훈련이고, 기쁨이고, 감사이고 나의 존재이유다.
나를 매일 만져주시고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한다.
그러한 하나님이 이 글을 읽어내려가준 당신과도 함께 하길 기도하겠다.
당신에게 이 블로그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어떠한 작은 매개체가 되어준다면 더할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