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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선택이란

QT

by Jzzn 2016. 7. 18. 01:33

본문

[출처: 비엔나 감리교회]


오늘 우리가 나눌 주제는 선택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 생활 가운데 이선택의 문제는 꽤 자주 다가옵니다.

심지어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라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선택이란 말이 나올 때 마다 선택을 잘 해야 한다라는 부담감이 따라 온다는 겁니다.

정말 광고 카피대로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할 수도 있고 평생을 좌우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편 다르게 생각해 보면, 과연 이 선택은 정말 선택일까 ? 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르게 말씀 드리면, 우리에게 선택의 문제가 올 때 선택을 안 하는 방법은 없을까, 또는 선택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보통 사람들은 이 선택의 시점이 와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면 그 결과는 좋던가 나쁘던가 둘 중 하나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를 보고 다음엔 이렇게 이렇게 선택 해야지 그럽니다.

그리고 그런 싸이클은, 어떻게 보면 평생 계속됩니다.

그래서 선택의 문제는 언제나 우리를 고단하게 만듭니다.

 

오늘 먼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바로 이겁니다.

이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 이제는 좀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겁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이제는 더 이상 선택이란 문제에 대해서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하실 텐데,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유심히 살피면 우리에게 선택이 어떤 모양으로 다가 오고, 그 선택에 대한 입장이 어떠해야 하며, 또 그 선택의 결과는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대해 말씀드릴 내용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리고 길게 끌 말씀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람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도 할 텐데, 실제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듯이 보입니다.

땅을 앞에 두고 조카 롯한테 선택을 하라 했더니 끝없이 보이는 목초지에 맑은 물이 콸콸 넘치는 소돔 땅을 선택하지요.

자기가 여태 삼촌의 은덕을 입었으면 우선권을 삼촌에게 먼저 드려도 될 것 같은데, 자기가 먼저 낼름 그 좋은 땅을 선택해서 떠납니다.

이제 남은 땅은 사방을 둘러 봐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아브람의 기분이 분명히 나빠야 되는데, 실제로는 그리 낙망하는 것 같지 않은 거예요.

이게 늘 주면서 사는 사람의 여유인가 봐요.

그런 아브람을 불러 놓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는 선택이란 단어 자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곱씹어 보면 이건 분명히 선택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어떤, 선택과는 전혀 다른 한 가지 주제가 숨어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작곡기법 중에 대위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 드리면 어떤 선율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전혀 다른 선율이 그 위에 얹혀지면서 조화를 이루는 모양입니다.   

주 멜로디 위에 전혀 다른 멜로디가 얹혀지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 반대지요.

훨씬 더 아름답고 조화롭고 풍성합니다.

우리의 선택에도 바로 이런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먼저 여기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아브람은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지요?

그리고 오늘 말씀에 의거해 보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어떤 선택을 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런데 그 어조가 강경하거나 비장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파스타를 먹을래, 립스(갈비)를 먹을래 하시듯 아브람이 어떤 선택을 하든 문제될 게 없다는 듯이 편안하십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아브람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결코 잘못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니 잘못되도록 하나님이 그냥 두시지 않겠다는, 하나님 당신의 자신감이 있으십니다.

물론 이건 하나님 편의 입장이고, 아브람은 또 어떠냐 하면 그 속에 흔들리지 않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 안에서야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게 아무 문제가 될 게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잘 못 될 때는 하나님이 고쳐 주실 테니까

그리고 잘못 되더라도 거기서 또 배울 게 있을 테니까

    

이 전체를 한 마디로 줄이면 그게 바로 우리가 자주 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선택이란 대위법의 또 하나 멜로디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즉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든 거기에 함께 얹혀져야 할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쪽,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때만이 선택이란 단어를 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가 요렇게 하면 죄 짓는 거긴 하지만 돈은 왕창 벌 수 있습니다. 할까요 말까요?‘ 이런 식의 모양은 선택 축에도 못 낀다는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 인생에 이런 일들은 우리들 자신도 감히 하나님을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문제 가운데는 광범위하게 이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때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방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동서남북을 펼쳐 놓으시고 보이는 땅 아무 데나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동서남북 다를 취할 수는 없고 그 중에 한 곳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동서남북 중 어떤 선택도 잘못된 선택은 없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한 번 쯤은 생각하실 줄 압니다.

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일까?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 이런 생각들 하시지요?  

그런데 이런 문제가 오게 될 때 여러분이 잊지 마셔야 할 게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란 것을 굉장히 작은 범위 안에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씀 드리면 하나님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가르쳐 주시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도대체 동쪽입니까 서쪽입니까? 아니면 남쪽, 또는 북쪽입니까? 답을 좀 분명히 하세요 하나님!” 이런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체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주신 것들을 존중해 주시면서 복을 베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 정 의를 허락하셨지요?

그것은 곧 뭐냐 하면,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태에 관한 분별을 할 수 있도록 태어나면서부터  그 능력을 주셨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가장 먼저 우리 생각을 존중하실 때가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택할 때, 즉 주님의 뜻을 구할 때, 내 생각은 무조건 나쁘고, 내 생각은 무조건 주님의 뜻이 아니고, 무조건 연약하고 무조건 지혜롭지 못하다는 생각은 배제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머리 속에서, 나 같은 것 속에서 뭐 그리 선한 게 나오겠어?’

아닙니다 여러분!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자로서 평소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분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면, 우리들의 판단은 그리 틀릴 게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와 지성, 감성, 의지를 십분 발휘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즉 선택의 틀을 크게 주신 가운데 세세한 부분은 우리에게 맡겨 두시고 그 위에 복을 내리신다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네가 어떤 곳을 선택하든지 잘 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동서남북 어디를 선택하든지 그것은 나쁜 선택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에 이런 식으로 역사 하실 때가 많습니다.

범위는 크게 주어 주시고 나머지 작은 부분은 우리의 성격과 취향과 기호에 맞춰 우리가 선택해서, 그 안에서 성실하게 우리 일을 해 나가시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지금 보이는 동서남북 중에서 아브람이 동쪽을 택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 아니야 다른 데 알아 봐 이렇게 나오시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 경우는 어떤 역사의 큰 줄기를 바꿀 때라든가 아니면 단 한 번의 판단에 엄청난 인명의 생사가 달려 있다든가 할 때, 그럴 때 가끔 보여주십니다.

그거나마 함부로 나서시지 않으십니다.

사사기 20장 이후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끼리 동족 상잔이 벌어지면서 하루에 수만 명이 죽는 기사가 나오는데, 그때도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으셨어요.

사실 그런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들을 잘못되게 방치해 두시는 게 아니라, 거꾸로 그만큼 우리들을 믿어주시는 신뢰의 표현입니다.

제대로 된 아버지라면 아들의 일을 함부로 막지 않잖아요?

하다가 실패해도 또 거기서 나름대로 배우는 게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놔 두시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와도 일단은 여러분의 생각으로 부딪혀 보시는 게 먼저입니다.

잘못될 걸 두려워 하지 마세요. 아니다 싶으면 분명히 성령께서 막으십니다.

그 동안 저는 인생의 중요한 고비 빼 마다 이런 식의 선택을 해 왔는데, 그리 잘 못 된 게 없었습니다.

 

선택이란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러면 이 문제가 그리 부담스러운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택과 하나님의 뜻은 항상 함께 할 것인데 그 중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거기서 나온 선택이나 판단은 언제나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지성, 감성, 의지가 활발하게 작용되도록 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이런 모습 가운데서 선택의 문제를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편안하게 생각하고 선택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게 있는데, 그것은 선택 이후에 일에 관해서입니다.

오늘 냉정히 살펴 보면 아브람의 눈썰미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선택하라 그랬더니 하필이면 가장 나쁜 데로 선택을 하는 겁니다.

(다같이 1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니 그 많은 평지를 놔 두고 왜 하필 산지입니까?

오늘 아브람이 선택한 헤브론이란 곳은 고지대에다가 지형이 아주 험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복 전쟁을 치를 때도, 이 헤브론은 험해서 그 정복을 가장 나중으로 미뤘을 만큼 그다지 사람 살기 좋은 곳이 못됩니다.

그런데 오늘 보세요.

하나님께서  얘야! 왜 하필 그 좋은 땅 다 놔두고 거기를 선택하니? “ 그러셨나요?

아닙니다. 산지를 선택한 것은 아브라함 개인의 취향이었어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게 뭘까요?

우리가 늘 기억할 게 그겁니다.

선택도 중요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게 서로들 큰 차이가 없다면 선택 후의 태도가 훨씬 중요하다는 겁니다.

태도가 불성실한데 선택을 아무리 잘 하면 뭐 하겠어요?

반대로 선택은 뛰어나지 못했을지언정 열심히 성실하게 대한다면, 그게 훨씬 잘한 선택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카피는 믿을 만한 게 못됩니다.

순간의 선택이 우리 생을 좌우하는 게 아니라 선택한 이후의 우리 태도가 우리 생을 좌우합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이상, 순간적으로 선택할 일도 없고, 또 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그게 우리의 평생을 좌지우지 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각오를 한다면, 우리는 어떤 잘못된 선택의 굴레에서도 탈출 할 수 있는 길이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광고 카피의 덫에 걸려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 라는 책을 쓴 빅터 프랭클 박사를 아시지요?  
그는 정신과 의사였는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유슈비츠에서  3년간을 보냅니다
. 
매일 그의 옆에서 동료들이 하나 둘씩 죽어 갔습니다
. 
하지만 그는 삶에 대한 불꽃같은 열정으로 그 3년을 버티고 살아남지요
. 
그는 스스로 삶의 의미를 다지려고, 아침이면 마당에서 주워 둔 유리조각으로 피가 나도록 면도를 했습니다
.  
나찌들은 잔인했지만, 그러나 그런 삶의 의욕으로 충만해 있는 프랭클 박사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은 그가 그 처절한 고통의 시간을 보낸 후에 쓴 고백록과 같은 책이었습니다
. 
그가 뭐라고 결론 내린 줄 아십니까
?  
"
고통을 선택할 수는 없으나 고통 받는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 

이 얘기는, 지금 자기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즉 자기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선택 당한 상황인데도 그것을 맞이하는 태도는 자기가 선택했다는 겁니다.

하물며 우리 스스로 선택한 사안에 대해서는 더더욱 성실한 태도로 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말씀 드린 대로 우리 인생에 과연 빅터 프랭클 박사 같은 경우가 몇 번이나 오겠습니까?

그때도 나름 대처해야겠지만 열에 아홉은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당연히 그 태도 또한 우리의 몫인데, 그게 그리 어려울까요?

 

오늘 본문 사건 이후의 아브람 기사를 읽어 보면, 이 선택이 옳았고 또 이 선택 후의 태도도 좋았고, 이 선택 위에 하나님께서 또한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몇 번 더 어려움이 오긴 하지만 아브람은 무리 없이 구속사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가 잘못 선택한 듯이 보이는 이 헤브로은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옛 수도로서 나라의 중심 역할을 톡톡히 해 냅니다.

아브람이 선택을 잘 해서가 아니라 선택한 이후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살았기에 거기는 복의 땅이 되었던 겁니다.

선택도 중요하지만 선택한 후의 우리의 태도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 안에서 새롭게 만드는 명제는 이렇습니다.

선택은 선택이고 선택 후의 태도는 필수다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믿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유의지 따라 우리 생각대로 먼저 부딪히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여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동행하신다는 조건이 있다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의지까지 지키십니다.

혹 지극히 잘못된 선택이다 싶으면 그때는 싸인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항로를 변경시키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계속 말씀 위에 서 있는 한, 우리는 잘못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여러분 자신과 한 없이 그 자유를 넓혀주신 하나님의 자유의지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내 생각대로 한 번 부딪혀 보십시오!

선택은 선택일 뿐, 최종의 결과는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선택이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시고, 선택 후의 우리 태도가 확고한 이상, 우리는 선택의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이 문제를 너무 어렵게 생각 마시고, 동서 남북 어디나 선택하라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어디를 선택해도 복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선택은 언제라도 나쁘게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 아브람을 따라서 그게 어디가 됐든, 갈데아 우르가 됐던, 애굽이 됐던,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 수풀이 됐던,모리아 산이 됐던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있는 자리가 어디가 됐든 예배자로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선택은 언제나 안전하고 하는 일마다 주께서 복 주실 것입니다.

선택의 기로라는 말이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그 선택의 자리가 복의 자리로 변화되는,  은혜로운 여러분의 평생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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